[e칼럼] 사반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한 양궁에서 배워야 할 것들
작성자 이복근 (211.♡.241.171)
[중앙일보] 이토록 싱거운 국제 대회 결승전이 있을까? 보통 우리나라 대표팀이 참여한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라면 손에 땀을 쥐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여자 양궁만큼은 좀처럼 그렇게 되질 않는다. 더욱이 결승전에서조차 그렇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비슷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이변이 벌어지지 않는 한 우리가 이기겠지.’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보듯, 우리와 다른 참가팀간의 실력차가 확연해서다. 우리나라 대표팀은 세 선수 모두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사소한 심리나 상황 변화에도 크게 흔들리는 다른 팀과는 분명히 달랐다. 4강전이었던 프랑스전에서는 갑자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리가 페이스를 잃지 않은 반면 프랑스는 처음부터 허둥댔다. 7점 이하의 실수를 연발했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중국전에서는 긴장감마저 사라졌다. 그런 국민의 마음을 아는 듯, 박성현 선수(25·전북도청)는 심드렁하게 10점을 쏘았다. 그것으로 승부는 끝이었다.

이런 종목이 있을까?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단체전이 생긴 후 6연속 올림픽 제패다. 무려 사반세기 동안 세계 최강의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이 기간 동안 우리 여자 양궁을 견제하기 위한 세계 양궁계의 노력은 차라리 눈물겨울 정도다. 거리별 메달을 없앴고, 대표 선수를 3명으로 제한했다. 한 번의 실수로도 탈락하도록 토너먼트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올림픽 주최국이 양궁 시합장을 바람이 많이 부는 곳으로 정한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발사 횟수와 시간을 줄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우리 대표팀은 요지부동이었다. 군소리 할 것 없는 세계 최강이다.

스포츠를 포함해 그 어떤 종목이나 분야라도 여자 양궁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 전례가 있었을까? 단연코 없다. 바둑이나 여자 골프가 세계 최강의 위치를 차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토록 오랜 세월 최강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바둑이나 골프는 요즘, 국적별 성적 상 춘추전국 시대다. 산업으로 보자면 조선업종의 최고 위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 1위도 10여년에 불과하다.

여자 양궁 경쟁력의 비결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스포츠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산업계에서도 동의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양궁이라는 종목은 우리에게 잘 맞는다. 육체적 강건함보다는 정신적 집중력을 요체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활 잘 쏘는 민족이란 오랜 전통을 들먹거릴 필요도 없다. 이 사실은 양궁이 도입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입증됐다. 1959년 한 여자 고등학교가 주한미군의 도움으로 팀을 만들면서 이 땅에서 양궁이 시작됐다. 1968년 전국체육대회에 양궁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후 기록이 급격히 향상되자,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0년이 채 안 돼 세계 대회에서 기록을 내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일본을 누르고 개인과 단체전에서 우승했다. 그 이듬해에는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 처녀 출전한 여자팀이 단체우승을 차지했다. 한 마디로 선택과 집중의 결과다.

저변이 넓지 않은 스포츠 분야에서 투자 효과를 극대화 하는 것이 바로 이 선택과 집중이다. 나쁘게 보자면, 이는 스파르타식 엘리트 교육이라고 비난받을 여지도 있다. 특정 재벌과 스포츠를 연계시키는 집중 지원방식 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스포츠 인구의 저변이 넓지 않은 상황에서 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다. 육체적인 강건함이 핵심적인 수영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양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는 박태환(19)이라는 선수를 발굴하자마자 집중적으로 지원한 것이 이번 올림픽에서 4백m 자유형 금메달의 결과로 나타났다.

실제로 우리 산업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오늘날 우리 경제의 성장 주역으로 떠오른 전자와 자동차, 정보통신과 조선 산업 모두 선택과 집중의 산물이다. 모든 산업 분야에서 모두 세계 최고가 되려고 했다면, 아마 우리는 세계 최고 산업을 거의 가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면에서 여자 양궁이 유독 두드러진 이유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투자 효과가 극대화 됐다는 점이다.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도 적은 자원을 투입해, 전무후무한 최고의 성적을 냈다.

투자 효과를 극대화 하는 메카니즘이 바로 경쟁의 내부화(internalization)이다. 국내 여자 양궁계는 그 동안 치열한 내부 경쟁을 겪어왔다. 우리나라 여자 실업팀 선수들은 70여명 가량이다. 여기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여하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수들을 포함하면 100여명 가량이 된다. 이들 모두가 세계적인 기량을 보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3명의 올림픽 대표팀을 뽑는다. 심지어 국가대표 되기가 세계 대회에서 메달 따기보다 더 힘들 정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진다. 이 정도의 경쟁률을 보이는 분야는 거의 없다. 세계적인 우리 산업들 역시 치열한 국내 경쟁을 통해 끊임없이 경쟁력을 향상시켜 왔다. 반면 독점이나 과점 상태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선보인 분야는 철강 산업 외에는 없다. 그러나 포항제철은 세계적인 경쟁 구도를 외면한 결과 일치감치 세계 무대에 뛰어든 인도 철강회사인 미탈사에 크게 밀리는 형국이 됐다.

수성(守城에)서 중요한 것이 세계 최고를 유지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자칫 방심했거나 자족했다가는 뒤쳐지게 마련이다. 여자 양궁의 훈련 변천사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세계적인 흐름을 언제나 한 발 앞서갔다.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극기 훈련이라든가 극심한 소음 한 가운데서 하는 소음 훈련은 이제 전세계 양궁 대표팀들이 하는 훈련의 일부가 됐다. 최근에는 대담함과 평상심을 키우기 위해 번지점프를 포함한 기상천외한 훈련이 추가됐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 대비해서는 개최국인 중국 응원단의 폭발적인 응원을 대비해 가능한 경기 현장과 흡사한 연습장 환경을 꾸미기까지 했다. 세계 양궁계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늘 앞서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자 양궁 세계 석권 25년의 비결이다. 세계 대회를 휩쓸 때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여자 양궁의 성공 비결을 본받자는 각계의 목소리 높아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산업계를 비롯한 각계가 그 성공 비결을 과연 길게 보고,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김방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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